영원한 화요일 오후
짧은 오늘 이야기 본문
막상 일기를 쓰려고 창을 켜보니 막막하다. 시간과 여유 없이 살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하는 게 많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실은 모르는 게 아니라 정말로 생산적인 일에는 손을 놨다. 슬슬 후환이 두려워서 손에 뭐라도 잡아보려고 한다.
가끔 들어가서 글을 읽어보고 혼자 조용히 좋아하던 블로그 하나가 폐쇄되었다. 내가 처음 그 블로그를 찾았을 때에도 이미 운영을 그만두신 상태라, 새로운 글이 올라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간 쌓여있는 글이 무척이나 많았고 한 포스팅 자체의 텍스트 량도 방대했을뿐더러 내용도 무척 깊었기 때문에 은밀히 숨겨둔 창고처럼 마음속에 묻어두고 있었는데, 오늘 들어가 보니 글 전체가 삭제된 상태였다. 약간의 박탈감이 들기도 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더 읽어볼 걸, 생각이 들기도 하고. 무언가 사라진다는 것을 강박적으로 무서워하는 감이 있어서 실은 인터넷 상에 올라온 것들은 그림이고 사진이고 글이고 간에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저장해두는 버릇이 있다. 이후에 정말로 꺼내보는 것은 극히 일부지만 그렇게 해야 안정감이 드는데, 운영을 그만두셨다고 해서 그 블로그가 그냥 그렇게 남아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아무것도 기록하지도 스크랩하지도 않았고 이제 기억나는 것은 유독 재미있게 읽었던 한 영화에 대한 리뷰뿐이다. 박탈감도 박탈감이지만 안타까움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든다. 그분 블로그를 보고 나도 블로그를 다시금 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는데 한참을 미루고 미루다가 그분이 흔적을 전부 감추고 나서야 블로그를 켜보는 나도 오래간 게으름을 피웠구나 싶다. 여전히 막막하지만 그분 같은 글을 쓰고 싶고, 그 분보다도 더 좋은 글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싶어서 간만에 새로운 다짐을 해본다.
지금도 자꾸만 텅 빈 블로그 링크를 클릭해보고 있다. 어차피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미련이 생긴다. 유일한 문장들은 방명록에 남아있는 인사말과 나처럼 블로그 완전 폐쇄에 안타까워하는 몇 분의 안부 댓글뿐이다.
어제는 시집 하나와 비문학 과학교양서 하나와 에세이 하나를 빠르게 읽었고, 오늘은 작문서 한 권을 다 읽었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나탈리 골드버그, 2005)」가 오늘의 책이었는데, 이 책의 가장 좋은 점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만들어준다는 것이었다. 작문에 대한 지침서를 썩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몇 년도 채 되지 않아서 읽어본 작문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게 중에서도 단언컨대 가장 글을 쓰고 싶게 만든 책이었다. 사실 어떤 부분에서는 터무니없이 불교적인(작가가 유태인인 미국인 부디스트다.) 부분, 해탈과 명상에 대해 다룬 기이하게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부분이 있어 전반적인 감상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책의 추천사에서 나오듯, 이 책의 스무 장, 서른 장, 마흔 장을 넘길 때마다 당장에라도 종이 위에, 아이패드로, 혹은 컴퓨터로 무언가라도 써보이고 싶은 충동이 인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글을 쓰고 싶게 만든다는 원동만으로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요즘 같이 아무것도 못하고 손 놓은 상태로 무력하게 존재만 하는 시기에 딱 좋은 책이기도 했다. 꾸준히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생각하고, 이야기할 것이란 다짐, 삶에 대해 깊게 생각할 것이란 다짐, 또 다른 많은 다짐들이 매번 무너지면서도 다시 세워지길 반복하면서 아주 조금씩이나마 나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이번 달은 넷플릭스를 끊어버리려고 했지만 결국 다음 달까지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스타트렉: 넥스트 제너레이션》을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족들이 넷플릭스에서 미국판 《지정생존자》, 《나르코스》 를 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넥스트 제너레이션》의 파일럿 에피소드는 그다지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지만 틀어두고 다른 작업을 하기에는 좋았다. 오리지널 시리즈의 커크 함장에서 피카드 함장으로 넘어오는 것에서도 살짝 낯선 느낌을 받아서 일단은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닥터 후》 오리지널 올드 시즌도 조금씩 보고 있는데 화질 때문에 아직은 영 불편하다. 예전에는 흑백 영화를 볼 때도 한동안 불편함을 느꼈었는데 이제는 잘 보는 걸 생각하면 무엇이든 도입만 참아보면 익숙해지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이야기 자체보다 시간을 들여 가지게 된 익숙한 것-그 감각을 좋아하는 게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올드 시즌은 물론이고 뉴 시즌 《닥터후》도 일부 에피소드를 재탕하기도 했는데 한창 방영 중이던 4~5년 전에 봤을 때와 느껴지는 감상이 확연히 달랐다. 동시에 내가 왜 그때 이 부분을 좋아했고, 또 싫어했으며, 이 쇼가 러닝 할 때 사랑했는지 드문드문 기억이 살아나는 감각을 느꼈다. 그건 좋았다. 시즌 8과 시즌 9의 닥터와 클라라의 관계를 참 좋아했고, 아직도 생각을 하면 어떤 감정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을 받는다. 오락적이면서도 가장 좋아하는 사랑(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랑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는,)의 관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매력 때문에 한창을 빠져 살았고 지금에 와서도 무기력한 현재에 좋은 기분을 가져다주는 창작물이 참 좋다. 재탕하는 김에 닥터후 오디오 드라마와 소설 추천도 받아서 원서로 된 닥터와 클라라 소설도 하나 샀다. 아직 배송은 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다. 무언가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순간에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하려고 한다. 이때에 영어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려보고, 글도 쓸 것.
사실 「T.S. 엘리엇 전집」과 스타트렉에 관련된 작가들의 비하인드에 관한 원서도 하나 샀는데... 정말 책과 영화에다만 돈을 쓰고 있는 듯하다. 책이 읽히는 때 빠르게 읽고 기록을 남기고 안 읽거나 필요가 없는 것은 중고로 판다. 뭐든 모아 보는 성질 때문에 필요하지 않은 책을 속아내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지만 통장 잔고를 보면 위기감이 성큼 다가와서 어쩔 수가 없다. 읽지 않는 그래픽노블 몇 과 에세이, 오래된 SF 소설들을 꺼내서 정리해놨다. 내일이면 박스를 찾아서 전부 정리해 보낼 것이다.
오늘은 영화를 보지 않았다. 「시나리오 구조의 비밀(린다 카우길, 2003)」에서 제시한 영화 목록에서 세 편을 빼고 나머지 영화는 모두 본 상태다. 늘어지면 안 되는데, 곧 끝날 거라고 생각하니 자꾸만 게을러진다. 내일은 꼭 <라쇼몽>을 볼 것.
TRPG의 세션 준비도 하고 있다. 마스터링, 혹은 시나리오의 작성에서 제일 큰 즐거움을 느낀다. 내가 플레이에서 재미를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게임은 내 취향에 썩 부합하는 취미는 아닌 것 같다. 무언가를 만들거나 상상해보는 것이 제일 흥미롭다.
학교에서 학생 작품 전시회 연락이 왔는데 참여하기로 했다. 다음 달까지 작업물 세 개 이상을 제출해야 한다고 해서 주제를 생각해보는 중이다. 단순함, 복잡함, 양자적, 무엇이든. 디자인에서도 손을 떼지는 않을 거고, 무기력을 떨쳐버리기 위해 스스로와 약속한 매일의 습관 만들기에 디자인 사진-레퍼런스를 하루에 10개 이상 모아보기도 추가했다. 초기라 썩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귀찮음이 크지만 일단 작은 것 하나라도 꾸준히 해보자는 마음을 먹으니 스트레스를 중화시키는 데에는 적절한 방안이 된다. 계속해서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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